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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트로
농경의 시작은 인류 탄생 이후 가장 위대한 혁명이라고 여겨진다. 전 세계 인구 60% 이상이 주식으로 삼는 벼의 기원은 어디까지 닿아있을까.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벼는 1997년 발굴된 1만5000년 전의 ‘청주소로리볍씨’로 알려져 있다. 중국 후난성에서 출토된 볍씨보다 약 3~5000년 정도 앞선다. 한반도 최초의 재배벼로는 1991년 발굴된 5020년 전의 ‘고양가와지볍씨’가 있다.
토종벼의 역사는 길지만, 우리나라 토양과 기후에 맞게 재배된 토종벼는 점차 사라지고 있다. 일제강점기·미군정을 거쳐 많은 토종 종자가 국외로 빠져나갔고, 1970년대 국내에서 ‘통일벼’ 개발이 활발해지면서 토종은 개량종에 밀려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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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진흥청에서 발표한 '나는 토종이로소이다'를 살펴보면, 토종이란 자생종과 재래종을 함께 일컫는 말이다. 자생종은 우리나라 자연에서 지금까지 생존해온 동식물의 총칭이며, 재래종은 사람에 의해 재배된 종을 의미한다.
다양한 식물유전자원을 보유하고 있는 농촌진흥청 산하 농업유전자원센터에서는 토종의 범위를 야생종, 재래종, 잡초형까지 보고 있다. 다만, 어디까지 토종으로 해야 할지에 대한 논의는 현재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한국토종연구회의 회장을 맡고 있는 김경민 경북대학교 교수는 “토종은 자연생태계에서 대대로 살아왔거나 농업생태계에서 농민에 의해 재배돼 우리나라 환경에 적응한 모든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 땅의 토종벼에 대한 연구는 일제강점기 무렵 일본 농학자들로부터 시작됐다. 연구 내용은 일제통감부가 1906년 설치한 권업모범장에서 1911~1913년 동안 한반도 토종벼를 조사한 기록인 ‘조선도품종일람’에 나타나 있다.
조선도품종일람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토종벼는 논 메벼 876종, 논 찰벼 383종, 밭 메벼 117종, 밭 찰벼 75종 등 총 1451종에 이른다. 아쉽게도 현재까지 보존돼 전해지는 토종벼 종자는 450여 종뿐이다.
최근에는 토종벼의 가치가 주목받고 있다. 전문가들은 토종 종자는 일반 작물보다 생산량이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나 기능성 물질, 색깔, 병해충 저항성, 환경 적응성이 뛰어나 육종재료로 유용하다고 말한다.
특히 토종벼는 주식인 쌀과 연결되기 때문에 가치가 배가 된다. 이주희 농업유전자원센터장은 “벼는 우리나라 식생활의 주식일 뿐 아니라 의식주 전반에 이용할 수 있도록 지역별로 다양하게 선발돼 온 귀중한 자원으로, 종자 전쟁 시대에 자원주권을 주장할 수 있는 자산”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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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매일 먹는 쌀은 언제 어디서부터 시작됐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벼의 기원은 어디까지 닿아있을까?
‘1만5000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벼가 우리 땅에서 발견되다.
“청주소로리볍씨는 중국 후난성에서 출토된 약 1만500년 전 볍씨보다도 더 오래된 세계 최고(最古)의 볍씨입니다. 인류사에서 가장 오래된 벼가 한국에서 발견된 것이죠.”
충북대학교 박물관팀은 1997~1998년, 2001년 두 차례에 걸쳐 지금의 오창과학산업단지 지역을 발굴하다 1만5000~1만7000년 전의 볍씨를 발견했다. 바로 ‘청주소로리볍씨’다.
당시 충북대학교 교수였던 이융조 한국선사문화연구원 이사장은 “지금까지도 청주소로리볍씨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벼로 밝혀졌고, 인정돼 오고 있다”고 말했다.
잘린 볍씨의 소지경은 야생벼와 확연히 구별된다. 청주소로리볍씨는 야생벼와 재배벼의 중간 단계로 알려져 있다. 이는 세계 벼 연구에 획기적인 의미를 차지함과 동시에 벼의 기원에 관한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다.
우리 땅에서 벼 재배가 시작된 역사를 알리는 볍씨도 있다.
한국선사문화연구소에서는 1991년 경기도 고양군(지금의 고양시) 일산 신도시 개발 전 지표조사와 문화유적 발굴 조사를 진행했다. 이때 충북대학교 발굴팀은 당시 일산읍 대화4리 가와지마을 발굴 현장의 토탄층 가래나무 층위에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볍씨를 발견했다. ‘고양가와지볍씨’ 발견의 순간이다.
고양가와지볍씨는 5020년 전 볍씨로 확인됐다. 고양가와지볍씨의 발견이 갖는 의미는 야생벼가 아닌 재배벼라는 점에 있다. 고양가와지볍씨의 탄생은 우리나라 벼농사의 기원을 밝혀줬고, 나아가 벼농사가 청동기시대에 시작됐다는 기존의 학설보다 앞당겨 신석기시대로 소급시키는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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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종벼는 어떻게 재배되고 있을까?
경기 양평과 전남 장흥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 경기도 양평군에서 토종벼를 재배하는 이근이 우보농장 대표
“씨앗을 받아서 심고, 다시 씨앗을 받는 ‘순환’의 과정에서 토종이 주는 매력에 빠졌다. 그러다 보니 2010년부터 지금까지 토종벼를 재배하고 있다. 토종볍씨를 꾸준히 모아 현재는 360여 종을 심고 있다. 처음 4000평에서 시작한 토종벼농사가 지금은 4만 평까지 늘었다.”
# 전라남도 장흥군에서 토종벼인 ‘고대미’를 생산하는 한창본 씨
“과거 일본으로 유출된 우리 토종볍씨를 심으며 그중에서 적색, 녹색, 검은색을 띠는 쌀을 각각 ‘적토미’, ‘녹토미’, ‘흑토미’라고 이름을 지어줬습니다. 벌써 22년째 이 쌀들만 보고 있네요. 토종이 유명 의류 브랜드처럼 농산물의 브랜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토종을 찾게 됐죠.”
이들은 공통적으로 토종이 주는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이 대표는 “토종은 생명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살고 죽는 생명이 아닌 아주 근본적인 생명. 토종벼를 살펴보면 우리의 5000년 역사를 알 수 있고, 문화를 알 수 있다. 단순히 먹는 쌀 이상의 더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
한 씨 또한 “토종벼 고대미가 한 농가의 브랜드를 만들어줬고, 쌀이 주는 부가가치를 끌어올리는 데도 큰 역할을 해줬다. 농부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만의 브랜드를 만들고 성장시켜 나가야 농업에서 경쟁력을 끌어올릴 수 있는 시대다. 토종은 그 열쇠가 될 수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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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와 달리 최근 식품 구매 시 소비자들이 중요하게 꼽는 것은 바로 ‘건강’, ‘기능성’, ‘고품질’….
이런 변화의 중심에는 쌀도 빼놓을 수 없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에서 2019년 전국 3275명을 대상으로 ‘가정에서 주로 먹는 밥의 종류’를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41.1%는 흰밥을 찾았지만, 흰밥에 잡곡이나 현미를 넣는 비중은 54.4%였다.
소비자들이 일반적인 흰쌀밥보다 현미·잡곡을 넣은 밥을 찾게 되면서 ‘기능성 쌀’에 대한 관심도 점차 늘고 있음을 보여준다.
8월 적진주찰이 재배되고 있는 논. 9월에 접어들면 논이 붉게 변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기능성 쌀의 품종은 종류가 다양하다. 눈에 띄는 색깔이 다양한 ‘유색미’, 구수한 누룽지 향을 풍기는 ‘향미’ 등이 있다.
예를 들어 붉은색을 띠는 찰벼인 ‘적진주찰’ 품종은 항산화물질 함량이 높고, 폐암·유방암 등 항암효과가 있는 폴리페놀 함량이 높다. 볍씨 상태일 때부터 밥을 지을 때까지 구수한 누룽지 향이 나 밥맛을 돋우는 향미 품종인 ‘향철아’, ‘설향찰’ 등도 있다.
기능성 쌀을 찾는 소비 트렌드는 농업 현장에도 많은 변화를 주고 있다. 기능성 쌀을 재배하는 농가가 점차 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기능성 쌀을 전문으로 재배하는 전북 김제의 유정열 씨는 “지금까지 ‘쌀’이라면 떠오르는 것은 흰쌀밥이었지만, 식문화가 변하면서 기능성과 다양성을 고루 갖춘 쌀들이 관심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토종을 심으며 지켜나가고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토종을 먹으면서 토종살리기에 힘쓰는 이들도 있다.
전남 강진 월출산의 수려하고 장엄한 모습을 따라가다 강진군 성전면에 있는 신풍마을 입구에 다다르면, 토종농산물로 음식을 만들면서 토종을 지켜나가고 있는 ‘가배울 토종한식당’을 찾을 수 있다.
가배울 토종한식당은 가능하면 토종농산물로 음식을 만든다는 원칙을 지켜나가고 있다.
이 식당의 대표 메뉴는 ‘토종 연잎밥 정식’과 ‘토종 옹심이 들깨탕 정식’이다. 토종 연잎밥 정식에는 향이 가득한 연잎에 토종 콩 5종, 토종 유기농 고대미(쌀), 밤, 대추, 단호박, 은행 등이 들어간다. 토종 옹심이 들깨탕에는 강원 횡성, 경북 봉화, 충남 아산에서 건너온 토종 들깨에 옹심이 3종이 들어간다.
가배울 토종한식당을 운영하는 김정희 (사)가배울 상임이사는 다양한 매력을 지닌 토종에 빠져, 이를 어떻게 보전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다 식당을 열게 됐다고 전했다.
“토종이 지닌 가치는 다음 세대를 위해 전승시켜야 해요. 토종을 보전하는 방법은 의뢰로 간단합니다. 토종을 꾸준히 심고, 먹고, 다시 심으면 되죠. 토종농산물로 음식을 만드는 식당을 연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코로나19 발생 이후 건강을 중시하는 식자재에 대한 소비가 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농산물을 생산하는 농업 현장에도 변화를 몰고 오고 있다. 일반 재배벼를 주력으로 하던 농가들이 토종벼 재배에 관심을 보이는 이유다.
하지만, 토종벼 재배는 오히려 농가에 큰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아직 안정적인 토종벼 시장이 형성되지 않았고, 적은 수확량과 일반 벼보다 비싼 가격 등 토종벼의 고질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어서다.
“토종벼 재배하고, 소득까지 올리려면 토종벼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안정적인 판로 확보가 필수다.”
토종벼를 재배하고 있는 한 농가는 관행적인 방식으로 토종벼를 재배하면 성공하기 쉽지 않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여전히 토종벼 시장의 가능성은 열려 있다.
“토종벼가 재배벼 시장을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기능성을 중시하는 소비 시장이 만들어지면서 토종벼가 지금까지의 쌀 시장과 다른 독립된 하나의 시장을 만들어 갈 수 있다고 예상합니다.”
토종벼의 가치를 내다본 김경민 한국토종연구회장은 토종벼가 더 활발히 재배되기 위해서는 재배 과정상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농가가 기존 방식대로 토종벼를 재배한다면 실패할 확률이 높아요. 토종벼 품종별 이해를 기본으로 하는 기술개발이 이뤄져야 하고, 기술 보급을 위한 노력이 병행돼야 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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